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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효종의 죽음과 제1차 예송 논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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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효종의 죽음과 제1차 예송 논쟁의 시작

1660년은 조선의 18대 국왕인 현종(顯宗)이 즉위한 첫 해로, 전왕인 효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발생한 정치적 격변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北伐) 정책이 동력을 잃고, 조선 후기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예송 논쟁(禮訟論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효종은 1659년, 재위 10년 만에 종기 치료 중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현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조정은 효종의 장례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가 효종을 위해 얼마나 긴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예법을 정하는 것을 넘어, 왕권의 정통성과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과 재야 세력이었던 남인의 정치적 명분을 결정짓는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1660년, 효종의 죽음과 제1차 예송 논쟁의 시작

제1차 예송 논쟁: 상복 기간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 즉 차자(次子)였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왕의 지위는 일반적인 차자와는 다른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송 논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서인(西人) 세력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으나, 혈통으로는 인조의 차남이므로, 계모인 장렬왕후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원칙에 따라 차자에게 입히는 상복인 기년복(朞年服,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왕과 일반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의 원칙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이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시하고, 왕이라 할지라도 예법의 규범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서인의 성리학적 입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남인(南人)의 허목(許穆)과 윤선도(尹善道) 등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었지만, 종묘사직을 계승한 국왕이므로 장자와 같은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장렬왕후는 장자에게 입히는 상복인 참최복(斬衰服, 3년)을 입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남인들의 주장은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즉 왕의 예는 사대부와는 달라야 한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이는 왕의 절대적 권위와 정통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으며, 당시 남인이 추구하던 정치적 방향과도 일치했습니다.

"신하들이 왕의 정통성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왕은 백성의 아버지이자 국가의 근본이다. 그의 지위는 예법으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어 장렬왕후가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인 세력은 정치적 패배를 당하고, 윤선도 등 주요 인물들은 유배를 가는 등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는 향후 15년 뒤에 벌어지는 제2차 예송 논쟁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의 불씨가 되었으며, 조선 후기 붕당정치가 더욱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벌론의 의지를 담은 효종 시대의 모습을 담은 고품질 이미지
이미지: 효종의 북벌 의지를 담은 역사화. 상복 논쟁과 북벌 포기 속에서 조선 후기 역사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줍니다.

북벌 정책의 종결과 새로운 대외 관계

효종의 승하와 함께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북벌론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효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군비 증강과 군사 훈련은 현종 시대에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공격적인 목표는 사라졌습니다. 현종은 즉위 초부터 불거진 예송 논쟁과 당파 갈등을 해결하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대외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1660년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공식적인 사무역(私貿易)이 이루어지는 책문무역(柵門貿易)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눈치를 보던 조선이 청과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경제적인 실리를 추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무역을 통해 조선은 청나라의 물자를 들여오고, 인삼 등 조선의 특산물을 수출하여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성과

1660년은 비록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지만, 효종 시대부터 이어져 온 문화적·경제적 노력들이 결실을 맺던 때이기도 합니다. 앞서 효종 시대에 간행된 농업 기술서 『농가집성(農家集成)』은 백성들의 농업 생산성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대동법 확대 실시와 상평통보의 주조는 조선 후기 경제의 발전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1660년은 효종이 꿈꾸었던 북벌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왕인 현종을 중심으로 예송이라는 이념적 논쟁이 시작되면서 조선 후기 정치사를 특징짓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조선의 학문과 정치는 더욱 복잡하고 치열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1660년 전후 주요 역사적 사건 도표

연도 주요 사건 내용
1658년 제2차 나선정벌 조선의 조총 부대가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군과 싸워 승리
1659년 효종 승하 재위 10년 만에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
1660년 현종 즉위 및 기해예송 효종의 아들 현종이 즉위하고, 상복 기간을 둘러싼 예송 논쟁이 시작됨
1674년 현종 승하 및 갑인예송 현종 승하 후, 며느리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제2차 예송 논쟁(갑인예송) 발생
1680년 경신환국 숙종이 서인에게 힘을 실어주며 남인 세력을 제거하는 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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